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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중단편

키스 한 번만 해줘요 上

 

 

 





키스 한 번만 해줘요 上

 

W. 몬트

 

 

 

 

 

 

 

 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화려한 것들을 좋아했었다. 값비싼 장식품들을 좋아했고 TV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들은 모두 명품을 둘렀고 조신한 말투를 사용했었다. 그들이 하는 말들은 나를 고양되게 만들었으며 나를 추앙하였다. 가죽 소파에 앉아 그들이 하는 말을 듣노라면 꼭 내가 왕이 된 것만 같았다. 유명한 대기업 사장의 아들. 실상은 젊은 날의 실수로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붙어서 작은 지분이라도 떨어지길 바랐다. 그러면 나는 못 이긴다는 듯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들을 비웃으며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웃어 보였고 또다시 나를 추앙하는 말들을 해왔다. 그게 내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그런 인간관계만이 내 전부였었는데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날 추앙하는 이들이 모두 귀찮아지게,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더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게, 값비싼 명품보다는 몇만 원짜리 체육복이, 조신한 말투보다는 거세고 차가운 말투가. 돌이켜보면 사소한 것부터 좀 더 중요한 것까지 나는 너로 인해 바뀌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네가 나를 처음 바라보았던 순간일까 아니면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순간일까. 내가 어둠이었으면 너는 빛이었다. 누구보다 빛이 나는 사람. 한 번 더 내게 다가온다면, 네가 없는 학교는 무척이나 지루해 늘 너의 생각만 나게 했다. 하루라도 너의 생각이 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요즘 들어 자주 네 생각이 났다. 울릴 리 없는 전화기에 작게 진동이라도 울리는 날에는 하루종일 기분이 들떴다가 조울증마냥 날이 어두워지면 우울해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체육관으로 달려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다. 교과서 모서리에는 페이지마다 너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무의식적으로 끄적이다 이내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마는. 그게 네가 나한테 남긴 선물이었다. 이게 미련일까. 좀 더 너에게 다가갔어야 했나. 그때 너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나. 그때 널 붙잡지 말았어야 했나. 그때, 그때. 만약 그랬다면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온 나는 늘 그렇듯 전학생이라 떠드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어디서 왔냐는 둥 왜 전학을 왔냐는 둥 그런 쓸데없는 질문들을 했다. 종이에다 그런 질문들의 답들ㅡ어디서 왔어? 서울. 왜 전학을 왔어? 아버지의 사업문제로ㅡ을 쓸까 하다 그냥 엎어져 버렸다. 그러면 대게는 한 두 번 정도 물어보다가 포기하고 자기네 반으로 돌아가 버렸기에 이번에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너도 전학생을 보러 온 그저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갈색으로 염색한 너의 머리는 검은 머리통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머리통 사이로 너의 얼굴이 잠깐 비췄다 사라졌다. 나를 한 번 쳐다보는 무심한 눈에 몽롱하게 늘어져 있던 정신이 맑아져 갔다. 그래. 시작은 너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너는 지나가다 보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왜소하고 작은 사람이었다. 너는 항상 검은져지를 교복 위에다 걸쳐 입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처음 봤을 때의 그 무심한 눈빛이 생각나 나는 일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애초에 3학년인 너와 2학년인 내가 영화에서처럼 친해질 리가 없었다. 한 공간에 놓인 평행한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친해지지 못했다. 1학기가 다 지나도록 친해지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해 우리는 어쩌면 한 공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사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꽤 상을 자주 탔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본 것만 해도 아마 대 여섯 번은 넘은 것 같았다. 교내 대회는 물론 교외대회들도 많았다. 네가 상장을 받을 때면 사람들은 네가 성공할 거라 말했다. 도 대표는 물론 국가대표에 나갈 거라고 했으며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흘러가듯이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닌 것에 대해 쉽게 말한다. 태권도 영재. 재능이 있는 아이. 그러나 그건 재능이 아녔다. 순수한 노력이었다.

 

 

 

  언젠가 체육관에 와이셔츠를 두고 온 게 생각이나 와이셔츠를 찾으러 갔을 때였다. 빈 체육관에서 너는 홀연히 서 있었다. 체육관은 넓었지만 너로 가득 찼다.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체육관 사이로 네가 비춘다. 도복을 입고 춤추듯 몸을 움직이는 너의 모습은 흰 나비 같았다. 흰 나비. 네가 찬찬히 발을 내딛자 오래된 나무는 가벼운 울음소리를 냈다. 네가 움직이는 발걸음에 흰 천들은 얕게 유영했다. 밤 내내 너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긴 밤 동안 나는 너를 생각했고 그 긴 밤에 나는 너에 대해 몽정을 했다. 검은 꽃에 둘러싸인 꿈이었다. 검은 꽃들 사이에 피어있는 흰 꽃 위로 흰 나비가 날아온다. 그 나비는 내 주위를 몇 번 날더니 너로 변한다. 너로 변한 나비는 웃는다. 너를 바라본 내내 너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음에도 웃는 널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 머리카락을 감싸 안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제일 처음에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었고 두 번째 물 밀려오듯 쏟아져나오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은 찌뿌둥했고 축축한 속옷에 기분이 문드러져 갔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세면대에 얼굴을 박으며 나를 저주했다. 병신같은 새끼.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차가운 물에 씻겨 나간다.

 

 

 

  다음날 수업 내내 나는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교과서 구석의 흰 종이는 단지 흰색이라는 이유로 너를 떠오르게 했고 그 글자들은 결국에 너로 변했으며 너로 변한 글자들은 부드러운 춤을 추었다. 그것이 하루종일 반복됐다. 이제는 눈을 감아 컴컴한 어둠이 찾아와도 너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마저 너를 떠올리게 하는 건 꽤 심각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네가 보였기 때문에 보이는 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어제 가져가지 못한 와이셔츠를 가져간다는 핑계였지만 나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끝내 와이셔츠를 가져가지 못했다. 이 와이셔츠를 가져가 버리면 얇게 이어져가던 우리 사이가 놓아져버릴까. 내가 잡음으러써 간신히 이어가던 인연의 끝이 끊어져 버릴까 불안했다. 그곳에는 어제와 같이 연습을 하는 네가 서 있었다. 시간이 수없이 흘렀지만 너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실수를 했다면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했다. 실수를 하지 않았다 해도 다시 그 동작을 반복했다. 너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 갈라졌으며 턱을 따라 땀방울들이 흘러내렸다. 푸르게 빛나던 창문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너의 연습이 끝날 때까지 체육관 문 뒤에서 너를 바라보았다. 무기력하던 너는 매트 위에 서면 생기있게 변하였고 굳어있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밝게 변한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가버렸다. 너는 태권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빛났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켠 것 같은 그런 은은한 밝음이었다. 그 날은 집에 돌아와서 태권도에 관한 대회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이내 얼마 안가 질려 끄고 말았다. 너와 비슷한 동작들이었지만 같지 않았다. 모든 게 너의 표절이었다. 매일 밤 내 꿈속에 나오는 너도, 이 경기들도 모두가 너의 표절이었다

 

 

 

 

  "너 좋아하냐"
  "뭘"
  "3학년 선배"

 

 

 

 

  앞자리에 앉은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 같이 어디를 놀러 갈 만큼 친하지는 않았지만 만나면 가끔 인사를 주고받는 그런 남자애였다. 누구라고 대답하려다가 내가 아는 3학년은 한 명밖에 없어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가끔 인사 정도만 하는 아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정도로 티가 났었나 싶다. 그런데 왜 너는 모를까.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도무지 긍정적이지 못하게 된다. 너를 저주하면서도 종내에는 결국에 너를 저주하는 나를 저주하는 그런 모순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 선배 창남이라던대"
 "...시발...."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해. 아, 혹시 너한테 몸이라도 대주는 거야? 너 부자니까 "

 

 

 

 

  주먹이 나건건 한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 아이는 쓰러져 있던 상태였다. 맞은 볼을 부여잡는 아이 위에 올라타 몇 번이고 그 아이 볼을 휘갈겼다. 말리는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고는 정신없이 그 아이를 때렸다. 처음에는 반 아이들 정도였는데 몰려든 인파를 보고 점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중에 네가 없길 바랐지만 너는 창문 밖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너 꽤나 아이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네가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이유는 언제나 비슷했다. 너의 외모. 너의 성격, 너의 행실. 너의 목격담과 저속한 농담들. 여자처럼 선이 가녀린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라고 하기에는 고왔다. 언젠가 너 봤다던 아이는 그날 밤 너 생각하며 딸을 쳤다 했다. 아이들은 웃었다. 너 우리에게 그런 존재였으나 실제로는 한마디도 붙이지 못했다. 너에게서는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온갖 저속한 말들로 너를 더럽혔으나 너를 더럽히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그런 취급을 받으면 안 된다. 너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왜 그게 너의 잘못이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시발. 아이의 얼굴을 내리치는 대신 바닥을 내리쳤다. 부딪힌 손이 아팠지만 아픔보다는 서러움이 컸다. 왜 너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건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너에게는 닿지 않는다. 아무리 울고불고 난리를 쳐봐도 너에게는 닿지 않는다. 열렬한 신자가 된 기분이었다. 듣지 않는 신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신자가 된 것만 같았다. 고소해서 네 앞길을 막을 거라고 소리쳤던 아이의 일은 비서가 와서 사과하는 걸로 일은 끝났다. 위자료라고 내놓으라고 소리친 금액의 3배를 던져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투에 들어있는 액수를 확인하는 아이 엄마의 표정은 늘상 보았던 것이었다. 하교할 때 아이의 엄마와 아이는 허리를 숙이며 배웅했다. 퉁퉁부은 얼굴을 내리누르며 모두 자신의 아이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가끔 얘기하는 애들조차 나를 경계했다. 이따위 학교 전학 가버릴 거라 말했지만 언제나 몇 분 뒤에 후회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연습하는 너의 뒷모습에 소리쳐보지만 닿지 않았다.

 

 

 

 

  그날도 흘러가는 그저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샤워를 하고 6시 반에 냉장고에서 에너지바를 먹었으며 6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고 사물함에서 책을 꺼냈, 아니. 아니다. 오늘 아침에 핸드폰이 꺼져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7시에 일어났기에 서둘러 준비를 하고는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부랴부랴 뛰어왔다. 늦게 오는 바람에 등교 때 너와 마주치지 못했다. 평소라면 너의 등교 시간에 맞춘 터라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텐데 너는 머리카락도 보여주지 않았다. 매 쉬는 시간마다 3학년 층인 3층으로 갔지만 너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너의 교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체육관 구석에 놓인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는 너를 닮아있었다. 너의 울음소리는 무심코 지나칠 만큼 작았으며 끊었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너는 울었다. 사실 네가 울었는지 울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울 것만 같았던 건 확실했다. 매일같이 입었던 도복을 집어 던지고는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너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제 공부나 해라.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천재는 이기지 못하나 봐. 수고했어. 불쌍하다. 안타깝다. 너에게 온 말들이 모두 너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갔다. 도 대표 탈락. 결과는 참담했다. 상대편은 천재라고 불려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항상 너를 비추었던 스포트라이트는 너를 비추지 않았다. 힘없이 체육관 바닥에 누워있는 너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다가가지 못했다. 다 괜찮다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은 살을 파고 들어가 얕은 상처를 냈다. 다음 날 너는 체육관에 오지 않았다. 학교에도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너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가슴속을 후벼 파는 허전함에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없는 텅 빈 체육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꽤 많이 마주쳤었다. 1학년 교실이 4층에 있었기 때문에 3층에 있는 영어교과실에 갈 때도, 오고 가는 등굣길에도 우리는 종종 마주쳤었다. 그러나 지금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체육관에도 등굣길에도 교실에도. 자그맣게 낙서가 쓰인 책상만이 네가 있던 것을 알려주었다. 이대로 네가 사라지면 어쩌지. 혹시 죽어버린 건 아닐까. 네가 사라지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3학년을 맡으신 선생님께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모른다는 말뿐 이였다.

 

 

 

 

 

  일주일 뒤 너는 다시 학교에 나왔다. 복도를 걷는 너의 어깨를 붙잡자 너의 손에 들려져 있던 문제집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어둠이 잔뜩 껴있었고 바닥에는 낡은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너의 어깨를 부여잡은 손은 덜덜 떨렸다. 어디서 뭐 했냐고 물어볼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네 앞에 서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종이 쳐서 그런지 한산한 복도는 적만 만이 우리를 감쌌다. 미안하다 사과하며 떨어진 문제집을 너의 품 안에 쥐여주었다. 너 손에 들려있는 문제집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 나는 네가 나를 지나치고도 한참을 복도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두려웠다. 현실을 직시한 네가. 그동안 일어났던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체육관에서 본 너는 사실 환상이 아닐까. 떨어진 문제집에 껴있던 1000원짜리 샤프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허벅지를 찌르는 이질적인 감촉에 눈을 감았다.

 

 

 

  졸업이 코앞이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우리는 더는 마주치지 못한다. 반년이라는 뭘 한 거지. 우리 사이는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이렇게 초조하지 않았을 텐데.

 

 

 


 

 

 

 

 

 

  "저기"

 

 

 

  손이 강하게 이끌려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 그 근원지를 바라보니 한 남자가 내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명찰의 색깔을 보니 노란색이었다. 파란색이면 몇 학년이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해보지만 딱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1학년 아니면 2학년 둘 중 하나인데. 작년에 졸업한 선배의 명찰이 붉은색이었다. 아, 기억났다. 2학년이구나

 


 

 

  "있잖아요, 선배"

 

 

 

 

 

  2학년의 얼굴은 점점 다가왔다. 머리에 닿는 벽의 느낌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이제 그와의 거리는 50cm도 채 남지 않았다. 숨결이 닿는 것 같기도 하다. 키가 비슷하지만 그는 나보다 컸다.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라든지. 느리게 올려다보니 갈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앞에 이 남자는 꽤 잘생겼다. 누가 봐도 아, 잘생겼다고 말할 만큼이었다. 전에 같은 반 여자애가 모델이라고 좋아했던 사람보다 잘생겼다. 남자는 환히 웃는다. 들꽃 같은 웃음. 그의 웃음은 그가 달고 있는 명찰과 꽤 잘 어울렸다. 그가 파란색 명찰을 달고 있어도 붉은 명찰을 달고 있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파란색 명찰은 그에게서 나는 청량한 냄새와 어울렸고 붉은 명찰은 그의 입술과 어울렸다. 명찰에 집중하느라 그가 뭐라 웅얼거렸지만 듣지 못했다. 

 

 

 


  "졸업 축하해요"

 

 


 

  볼 옆으로 숨결이 닿는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주먹을 쥔 손을 들키기 싫어 뒤로 숨겼다. 그는 마이 단추에 손을 얹었다. 단추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짓에 숨을 멈추었다. 내려앉은 그의 눈빛은 깊은 심해를 닮아 있었다. 그의 손은 금색의 단추 위를 몇 번 유영하더니 이내 그것을 가볍게 비틀어 떼어냈다. 핏줄이 솟아있는 손은 단추와 함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교복을 입을 일이 없기에 상관은 없지만 왜 이러는 걸까. 허전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내 머리를 툭 툭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내 얼굴을 붙잡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만 남자가 붙잡고 있는 터라 시선을 내리까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그와의 거리는 10cm도 남지 않았다. 남자는 그대로 멈춰 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는 몇 분을 그렇게 있다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사라졌다. 이석민. 그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여러 번 곱씹었다.

 

 

 

  "졸업 축하한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는 금세 멀어져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는 자기의 친구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반에서 딱히 친하다 할 친구는 없었기에 끌어안고 우는 대신 앞에 놓여있는 자장면을 집어 들었다. 졸업이지만 그렇게 실감은 나지 않았다. 이유는 뭘까. 학교에 애착이 있는 게 아니라서? 떨어진 순간부터가 꿈이라서?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태권도를 한순간들이 모두 몇 년 전의 일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직업을 선택하고 있었다. 나는 뭐지. 1학년 때는 자신 있게 태권도 국가대표라고 썼다. 2학년 때도 자신 있었기에 태권도 국가대표라고 썼다. 그러나 현실이 코앞에 닥친 지금 나는 국가대표는커녕 도 대표에서 탈락했다. 그 대신에 나는 지방에 있는 한 대학교에 붙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공부한 것 치고는 꽤 좋은 결과였다. 졸업하고는 분명 평범한 회사원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할지도. 좀 더 연습했더라면 아니 나한테 재능이 있었더라면. 노력하는 사람은 천재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번 연도에 그런 이가 니타난걸까. 조금만 더 빨리 나타났으면 희망을 품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더라면 도전은 해봤을 텐데 왜. 백만 번을 연습해도 내가 그를 이길리 없잖아. 아직도 손이 떨린다. 줄곧 나를 향해 비춰왔던 스포트라이트는 내게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 이건 분명한 질투였다. 지금까지 뭘 한 거지. 내게 남은 거라고는 굳은살뿐이었다. 목가로 넘어오는 자장면이 쓰다. 속이 더부룩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반쯤 남긴 자장면을 구석에 밀어넣았다. 토할 것 같았다. 깊은 구토감에 화장실을 들어가 구역질을 하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뭉친 침을 뱉고는 세면대 물로 입을 헹구었다. 거울에는 멍청하게 생긴 아이가 서 있었다. 클 거라며 한 치수 크게 맞췄던 교복은 여전히 헐렁했다.

 

 


 

  "바보 같다"

 

 

 

 

  두 번째 단추가 빈 마이를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고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저지당했다. 마이는 내 손에서 떠니 누군가에게로 넘어갔다. 소실감에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너"

 

 


 

  아까 학교에서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왜 그가 여기 있는 거지. 졸업한 선배라도 따라 왔나. 누구를 따라온 거지 원우인가 지훈인가 그것도 아니면 준휘인가. 근데 왜 하필 이 회장실에 있는거야. 다른 화장실도 많을 텐데 하필 지금. 그에게서 마이를 가져오려 하지만 그는 마이를 자신의 뒤로 감추었다.

 

 

 

 

 

  "왜 그래요. 제가 단추 떼어간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이거 버리지 말아요.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니까"

 

 

 

 

 

그는 손에 들린 마이를 몇 번 털더니 내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려버렸다. 빨리 가버리라고 그렇게 외쳐보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에 닿는 시선들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뭐"
  "좋아해요. 선배. 마지막이니까 키스 한 번 만 해주세요"

 

 

 

 

 

  내가 그와 입을 맞춘 건 동정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듯이 나도 그에게 동정을 한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애절해서. 부스러질 것 같은 웃음을 하는 그는 금방이라도 툭 치면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웃기는 녀석이었다. 졸업식을 하는 건 난데 더군다나 우리는 처음 본 사이인데 왜 그가 울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인지. 그냥 그의 뒷목을 끌어당기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나를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듯 내 입술을 열고는 치열을 훑고 혀를 섞어왔다. 딱히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뺨을 때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의 머리를 툭 툭 두들기고는 화장실을 나설뿐이었다.

 

 

 

 

 

 

  "가지마요. 그냥 옆에 있어요"

 

 

 

 

 

 

  데자뷰다. 또 붙잡혔다. 붙들린 손은 아까와 달리 무척이나 차가웠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붙잡는 걸 좋아하는지. 중간에 먹다 나온 것이라고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르튼 자장면 때문이었다. 그래 그뿐이었다.

 

 

 

 

 

 

 


 

 

전학 온 첫날 순영이한테 반한 석민이 X 태권도 국가대표를 꿈꿨던 순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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